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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의 현장을 찾아서... 1999-2009

1990년 백두산을 찾으면서부터 시작된 조선족에 대한 연구는 자연스럽게 독립운동사의 현장을 만나게 하였다. 두만강 변에서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현장을 보았고, 들리는 마을마다 열사비를 볼 수 있었다. 청산리와 봉오동은 민족적인 독립 운동가들의 활동무대를 기념한 것이지만 열사비는 조선인들이 항일전쟁과 중국의 해방전쟁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증거로서 연변지역에만 600여개의 열사비가 있다. 중국의 대시인이며 신 중국 건설 초기에 문화부장을 지낸 하경지賀敬之는 연변을 방문하여 산마다 피어있는 진달래꽃은 마을마다 서있는 열사들의 영전에 바치는 화환이라는 의미로「山山金達來 村村烈士碑」라고 노래를 하였다고 한다. 한민족韓民族의 독립운동, 그기에 중국의 항일전쟁과 해방전쟁 까지 더한다면 얼마나 많은 우리민족의 피가 이 땅에 뿌려졌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중국을 방문하면서 스쳐지나가는 독립운동의 현장을 하나 둘씩 기록하기 시작했다.

2004년 독립기념관과 국립민속박물관, fotato.com, 경일대학교의 산학협동으로 신청한 “조선족 생활양식의 지속과 변동-중국 동북삼성에 산재한 조선족 민족향의 영상인류학적 기록”이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협동연구과제로 선정되면서 연구책임자가 되어 독립운동사연구소의 이명화박사와 국립민속박물관의 김시덕 박사와 함께 2004년부터 2006년 사이에 20여 차례 중국의 동북삼성인 흑룡강성, 요녕성, 길림성에 산재한 조선족 민족향진을 찾았다. 답사예정지에 대한 사료 조사는 이명화박사가 담당하였고 라포rapport들을 동원해서 현장을 찾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그리고 김시덕박사는 답사지역의 민속적인 부분을 정리하였다.

현장을 방문하면서 확인한 것들은 독립운동사의 현장이 단순한 독립전쟁의 현장을 넘어서서 이상촌을 건설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집단적으로 이주하여 혹한의 땅인 만주벌판에서, 당시 최첨단 영농기법인 논농사를 성공시켜 경제적으로 자립하였다. 그래서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한 민족혼의 정립하고, 독립군의 양성으로 일제와 투쟁하여 연구적인 해방구를 건설하려고 하였다. 아쉬웠던 것은 이러한 것에 대한 연구자들의 성과를 통합하고 체계적으로 종합하여 정리를 하는 부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독립운동사에 대한 연구자, 독립운동가의 후손이나 기념관, 종교와 관련된 부분을 연구하는 종교단체, 국사학계 등의 연구 성과를 통합하여 하나로 어우르는 목적을 가진 단체나 기관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다.

이상촌에 관련된 곳에서 먼저 확인할 것은 지금의 길림성 화룡시 용성향龍城鄕 청호촌淸湖村에 설립된 대종교에 관한 것이다. 홍암 나철에 의해 중광 된 대종교는 1911년 청파호로 불리든 이곳에 총본사를 옮기면서 2세교주인 김교헌시대인 교세가 확장되어 신도수가 30만 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2세교주인 김교현은 1918년「대한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다. 이것은 일제에 대한 무장혈전주의를 선언한 것이며「2․8독립선언서」와「3․1독립선언서」의 기폭제가 되었다. 특기할 사실은 여기에 서명한 39인 가운데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대종교인이라는 것이다. 임시정부의 산파역을 담당한 신규식도 대종교의 시교자 자격으로 중국으로 건너간 인물이었으며 임시정부의 국무위원급 이상으로 참여했던 대종교 인물은 20여명을 헤아린다. 또 청산리전투의 주역이었으며 대표적인 항일 무장투쟁론자인 서일 역시 대종교의 중심인물이었으며 그가 최고 책임자로 활동한 중광단, 대한정의단, 북로군정서의 대원들도 대부분 대종교의 교도들이었다. 3세교주인 윤세복은 일제의 박해를 피해 대종교 본사를 지금의 흑룡강성 영안시 발해진으로 옮겼으며 1933년 백산안희제와 함께 경박호와 목단강 상류의 물을 막아 발해봇둑을 설치하여 향수 상관, 하대원, 유창, 봉화 삼영 등 1500정보에 논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토지를 매입하여 발해농장을 건설하여 중국인 지주들에게 착취당하고 있는 조선인 소작농 300여 가구를 이주시켜 농사를 지어 자립할 수 잇도록 하였으며 대종학원을 설립하고 대종교에 관한 서적을 간행하여 종교적 기반을 구축하는 등 이상촌을 건설을 목표로 삼았다. 후일 중국은 발해봇둑의 자리에 아보阿堡수력발전소를 건설하여 활용하고 있다.

가장 오래 동안 지속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 흔적이 남아있는 이상촌은 명동촌이다. 용정시 지신향에 있는 명동촌은 규암 김약연 목사를 비롯한 도천 남종구, 성암 문병규, 소암 김하규, 윤하현 등은 교향인 함경북도 종성의 토지를 팔아 비교적 땅값이 싼 이곳의 넓은 당을 구입해 이주를 하였고 토지 중 가장 좋은 만평을 일을 학전으로 때어서 그곳에서 나는 수입으로 교육기금 마련하였다. 그래서 규암재(1901년) 소암재, 오룡재 등 서당을 설립하였고, 최초의 근대학교로 용정에 설립된 서전서숙이 일제의 탄압 등으로 문을 닫자 그 정신을 이어받아 기존의 서당을 통폐합하고 명동서숙을 설립하여 명동학교로 발전시킨다. 명동학교는 1909년 정재면이 초빙되면서 우여곡절 끝에 구성원 전체가 기독교를 신봉하면서 명동교회를 설립하고 성경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1910년 중학부, 1911년 여학부를 설립하고 “항일독립의식을 가진 인재양성”을 교육목표로 삼았다 그래서 명동촌은 1910년대 와룡동 소영자 등과 함께 간도의 교육과 문화 그리고 항일운동의 발상지가 되었다.

명동촌의 지도자인 규암은 교육자나 독립운동가를 넘어서는 독립을 갈망하고 자립을 실천한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는 교민들의 보호와 국가의 장래를 위해서 조선인 독립운동가 뿐만 아니라 연길 도윤 도빈 등 청나라 관리나 일본에서 파견된 관원들과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결코 자신의 신념은 버리지 않았고 당파와 종교를 초월하여 수많은 인사들을 보살펴주었다. 그가 참여한 단체는 간민회, 국민회, 길동기독전도회, 충렬대, 단지동맹회, 광복단, 등이다.

규암은 1909년 이동춘 등이 설립한 간민교육회를 토대로 조선인들의 자치기관인 간민회를 건립하였다. 간민회 장정은 “두만강을 건너와 잡거하고 있는 수십만의 간민들의 상호간에 친목을 도모하고 중국의 법률을 연구하여 동일한 언어와 풍속을 실현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그래서 길림동남로 관찰사서吉林東南路 觀察使署와 길림도독吉林都督) 인가를 받아1913년 5월 총회를 개최하여 간민회를 탄생시켰다. 간민회는 중국정부의 보호아래 있는 민간단체였으나 실질적인 간도 조선인들의 자치기관이었다.

1912년 조선인 북간도 교회를 대표하는 김약연외 15인은 함경도 성진에 근거를 갖고 제동병원과 협신학교를 운영하던 카나다 선교부에 청원서를 보내어 목사와 전도사를 요청하면서 서양식 병원과 근대식중학교를 지어줄 것을 요청하였고 영국인 구예선(具禮善, Robert Grierson) 박사를 비롯한 선교부에서는 용정에 넓은 대지를 구입하고 선교부를 설치하여 박걸(A. H. Baker 朴傑)선교사를 선임하여 속칭 영국덕이에 치외 법권 지역을 만들어 최신시설과 근대문화를 완벽하게 수용하는 제창병원과 은진중학교, 명신여자중학교와 명신소학교를 설립하였다. 규암은 학교설립 때에는 이사로, 1925년부터는 이사장으로 명동학교의 정신을 이들 학교에 계승시켰다. 이들 학교는 외국 선교사들이 경영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1944년 일본인에 의해 경영권이 넘어갈 때까지 애국가를 부르며 태극기를 계양하는 등 민족교육에 앞장설 수 있었다.

규암은 1919년 간도 조선인들의 대표로서 노령의 조선들과 임시정부 조직인 국민의회건립에 참가하였고, 연해주에서 개최된 한족韓族중앙총회에 참가하는 등, 여운영, 이동휘 등과 독립운동의 연합전선을 시도하였으나 결실을 얻지 못하였다. 1920년 2월 상해임시정부에서도 각료로 임명하고 초청장을 보내왔으나 3. 13 만세사건 등으로 학교도 불에 타고 제자들과 교사들의 투옥과 전사소식을 듣고 간도로 돌아왔다. 일제는 그를 체포하기 위해서 총력을 기울였지만 연길도윤의 도빈의 호의로 피 보호수가 되어 2년 동안 국자가 감옥에 연금되었다. 1922년 가을 석방이 되자 다시 명동학교 교장으로 재임하는 중 평양의 장로신학교에서 그의 종교적, 교육적인 면을 참작해서 반년간의 청강으로 졸업장을 주기로 하여 1929년 학교를 떠나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1930년부터 명동교회의 목사가 되었으며 은진, 명신학교의 이사장이 되었다.

1942년 10월 29일 용정의 자택에서 “나의 행동이 나의 유언이다”라는 말을 남긴 채 74세의 일기로 운명하셨다. 규암 내외와 아들 3형제의 유택은 정재촌의 뒷산에 있으며 사자산이라 부른다. 풍수전문가의 말을 따르면 사자가 돌아앉아 대변을 보는 형국인데 그 아랫동네는 영웅과 인재가 우후죽순처럼 나오는 명당자리로 여긴다고 한다.

신민회회원들은 국내에서의 대일항쟁의 한계성을 절감하고 제2의 독립운동 기지를 선정할 것과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고 독립전쟁을 전개한다는 방침을 추진해 나간 곳으로 유하현 삼원보지역을 들 수 있다. 그것은 이회영일가의 6형제와 이상용․김동삼․이동녕․김창환․여준․주진수 등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4월 유하현 삼원보 대고산柳河縣 三源浦 大孤山에서 이주한인 300여 명을 모아 군중대회를 개최하면서 첫째, 민단적 자치기관의 성격을 띤 경학사를 조직할 것, 둘째, 전통적인 도의에 입각한 질서와 풍기를 확립할 것, 셋째, 개농주의皆農主義에 입각하여 생계방도를 세울 것, 넷째 학교를 설립하여 주경야독의 신념을 고취할 것, 다섯째, 기성군인과 군관을 재훈련하여 기간장교로 삼고 애국청년을 수용하여 국가의 동량인재를 육성할 것 등 5개항을 결의하면서 한인자치단체인 경학사耕學社를 창립한 것이다.

1911년 여름 유하현 삼원포 추가가鄒家街에서는 경학사의 주도로 무관 양성을 위해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를 설립하였다. 경학사가 해체된 후에는 통화현 합니하로 이전하여 부민단을 결성하고 교명을 신흥학교로 개칭하고 10년간 운영하였다. 1919년 국내에서 3․1운동이 일어났고 압록강을 건너 탈출한 많은 애국청년들이 학교의 명성을 듣고 찾아오자 서로군정서에서는 학교의 확장이 시급함을 인정하고 하동河東의 때두자大肚子지역에 40여 간의 교실과 수 만평의 연병장을 건설하여 교육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1919년 5월 3일 학교이름을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로 개칭하였다. 대두자는 유하현 고산자에서 약 15리쯤 동남쪽으로 좁은 길로 들어간 오지로 애국지사들의 집단촌을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현재 이곳의 행정명은 유하현 전승향全勝鄕이다. 님웨일즈의 『Song of Arirang』의 주인공 김산(장지략)은 대두자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하여 “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18개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눈에 잘 띄지 않게 산허리를 따라 나란히 줄지어 있었다.”고 회고한 곳이 이곳이다.

신흥무관학교에서는 군사교육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민족정신 함양에도 노력하여 인간의 덕성교육과 경제․교육․과학 및 사범 교육을 실시하였으며 국어․국사․지리교육을 강조하였다..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6월에 유하현 고산자로 다시 이전하였다. 그리나 일제의 토벌과 마적의 습격, 윤치국치사사건 등으로 인하여 결국 1920년 8월에 폐교되고 말았다. 이후 지청천은 차선책으로 교성대敎成隊를 조직하여 백두산으로 이동하여 재기를 모색하였으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의 활동지역은 만주와 중국의 본토 등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학교가 만주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만주에서 활동한 졸업생이 많았으며 대표적인 무장독립운동단체로서는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대한통의부․정의부․신민부․국민부 등이며 의열단과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서도 활동하였다.

신민회 회원이며 세브란스 의학건문학교 교수이던 김필순은 <테라우찌마사타게 조선총독 암살 미수사건>의 혐의를 받아 1911년 12월 단동을 거쳐 망명하여 통화에 병원을 설립하고 50㎞지점에 있는 삼원포로 이주해 온 신민회 회원들과 함께 독립운동기지 개척 사업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가 도산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의 주소는 중화민국 성경성 통화현 동관 야소교회당(中華民國 盛京省 通化縣 東關 耶蘇敎會堂)이라고 적혀있다. 당시의 야소교회당은 현재 통화시 동창구 신화대가(東昌區 新華大街) 73호 이며 그 자리에는 3층으로 증축된 동창구 기독교회가 있으며, 신화대가 4거리에서 통화시 인민병원 방향으로 개천을 따라 100여m 거리에 있다. 당시 일본영사관 자리는 1㎞정도 거리에 있다.

신민회의 이상촌 건설운동의 주역인 그는 일제가 통화지역에 일본 영사관을 세우고 감시와 압박을 가해오자 일본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은 곳에 기지를 개척하고자 1916년 내몽고 치치하얼로 이주하여 130여리에 달하는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만주를 떠돌며 소작하는 한인동포들에게 무상으로 땅과 농기구를 배분하여 개간에 착수하였다. 치치하얼의 이상촌은 사람이 살지 않은 척박한 황무지였으나 땅을 개간하기 시작하자 이주민이 100가구(1,000여명)로 증가하였다. 치치하얼 시관병원의 의사로 복무하게 된 김필순은 러시아군의관의 직함으로 활동하였으며 가족들과 함께 치치하얼 시내의 시관병원 관사에서 생활하면서 관사에 따로 개인병원을 운영하여 흑룡강성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독립군들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거류지를 마련해 주었다. 이상촌은 번창해 나갔고 치치하얼 부근에 새로이 독립군 기지도 마련되었다. 그러나 1919년 9월 1일, 김필순은 일본인 조수가 주는 우유를 마시고 급서하였다. 그의 부인은 독립운동의 흔적이 될 만한 모든 자료들은 불태웠다. 이후 일본 영사관에서 김필순의 집을 수색하였으나 증거가 나오지 않아 자식들은 안전할 수 있었다.

북미의 한인단체인 국민회가 중심이 되어 설립한 태동실업주식회사는 주당 50불씩 1천주로 모집해 자본금 5만 달러의 자금을 확보하고 독립군기지 개척을 시도한 곳은 지금의 밀산지역의 봉밀산이다. 1909년 4월 이 돈은 이상설에 의해 러시아에서 세운 원동임야주식회사로 보내져서 봉밀산蜂蜜山에 토지를 매수하여 개척을 시작하였다. 이곳은 흥개호라는 거대한 호수가 러시아와 중국의 국경을 이루고 있으며 1910년대에는 중국령이지만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러시아에 속한 곳으로 일제의 세력이 미치지 않으면서 러시아와의 교역이 가능했다. 그래서 이 지역은 만주와 러시아의 한인사회를 연결할 수 있는 등 독립운동에 적합한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고, 백포자白泡子는 넓은 평원의 비옥한 토질은 농사에 적합하였다. 1911년 7월 2,430에이커의 땅을 구매한 국민회는 백포자마을을 개척하여 국민회 만주지방회의 조직을 만들고 교육과 산업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기독교 교회와 대종교 교당을 설립하였다. 한편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톡의 자산가 김학만과 1908년 5월에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해 온 이승희와 협의하여 45만평의 토지를 사들이고 이곳에 ‘한흥동韓興洞’이라는 마을을 건설 하였다. 당시 봉밀산에는 150여호, 100호, 50호 등 3곳의 한인 부락과 약 200호의 산재호가 있어서 1909년 7월 15일에는 근대교육과 군사훈련를 병행하는 동명학교를 개교하였다.

봉밀산의 독립운동기지 개척 사업은 거듭되는 흉년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지만 이후 이 지역이 계속적으로 한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특히 홍범도는 1916년 빈민 300여 호를 이곳에 이주시키고 한흥동에 소학교를 세워 한인 자제들의 교육과 독립군 양성사업을 추진하였으며, 1920년 10월 북로군정서와 대한독립군 등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끈 독립군 부대가 일본군의 보복 공격을 피해 북정 길에 올랐을 때 3천여 명이 모여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한 곳이며,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비극인 ‘자유시참변’으로 타격을 입은 독립군 부대들이 가까스로 조직을 정비한 곳이기도 하다.

독립군 군관학교가 건설된 곳은 수없이 많다. 그 중에서 쾌대모자로 불리던 지금의 통화현에서 약 25㎞ 지점인 강전자진江甸子鎭에는 왕청문 화흥학교에서 운영되던 조선혁명군 군관학교가 옮겨와 총사령 양하산을 교장으로 1932년 봄부터 가을까지 약 6개월 간 조선혁명군의 각 연대와 지방부대 등에서 선발된 4백여 명의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속성군관학교였다. 당시 일제는 이곳 군관학교를 분쇄하고자 폭격을 감행하였는데 오폭한 흔적이 이웃마을인 동강촌에 남아있다, 현제 서광촌에는 두 개의 조선족 마을이 남아 있으며, 약수가 나오는 용두산 입구에는 폐교된 옛 동평조선족소학교가 보이고 정상에 오르면 더 넓은 강전자벌과 군관학교자리가 한눈에 들어온다. 통화현에 살고 있는 백운봉(1943년생)씨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부친 백문현(1973년 사망)이 군관학교의 전신인 왕청문의 화흥학교를 졸업하고 이곳에서 독립군으로 활동하였으며, 외삼촌은 양세봉장군의 부관인 이택준으로 장강전투에서 전사하여 통화시내 서대문위에 효시를 당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본인이 확인하지 못한 여러 지역에 여러분의 선구자들이 이상촌을 건설할 목적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였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은 우리민족의 크나 큰 자산으로 길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본연구자는 사실적인 기록을 기본으로 현장성을 표현하고 그기에 시각적인 아름다움을 더하고자하는 것을 생각하는 사진가이다. 그래서 현장의 시각적인 면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나의 이러한 현장성을 바탕으로 하는 작업이 그들의 정신적인 세계가 더욱 더 빛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기를 기원한다.

-강위원

EBS 다큐멘터리 세계테마기행 - 강위원과 함께하는 중국 동북지방의 겨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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